우리나라 차의 역사 Up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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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. 가야
ꡔ삼국유사ꡕ의 「가락국기」에는 당나라에서 차씨가 신라에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수로왕의 「수릉왕묘(首陵王廟)」에 제향을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.
수로왕은 왕후(아유타나라의 공주, 성은 허(許), 이름은 황옥(黃玉)) 간 뒤로 매양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여 비탄을 금하지 못하더니 왕후 간 지 10년 지난, 후한 헌제(獻帝) 10년(199년) 3월 23일 붕어 했다. 향년 158세였다. 온 나라 사람들이 부모를 여읜 듯, 왕후가 붕어할 때보다 더욱 비통해 했다. 대궐의 동북방 평지에 높이가 한 길, 둘레가 3백 보 되는 빈궁을 축조하여 장사지내고 수릉왕묘(首陵王廟)라 하였다. 그 아들 거등왕에서부터 9대손 구형에 이르기까지 이 묘에 제향을 드렸는데, 반드시 매년 정월 3일과 7일, 5월 5일, 8월 5일과 15일을 기해 풍성하고 청결한 제전이 끊이지 않았다. 신라 제 30대 문무왕 때, 당 고종 12년- 즉 문무왕 즉위년(631년) 3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칙을 내렸다.
“가야국 시조왕의 9대손 구형왕이 이 나라에 항복해 올 때 데리고 온 아들, 세종(世宗)의 아들인 솔우공(率友公)의 아들 잡간 서운의 따님이신 문명왕후(文明王后)가 바로 나를 낳으신 분이다. 그러므로 가야국의 시조왕은 이 사람에게 곧 15대 시조가 되는 것이다. 그분이 통치하던 나라는 이미 망했으나 그분을 장사지낸 묘는 아직도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설(合設)하여 그 제사를 계속케 할 것이다.”
그리하여 가야국의 옛 성터에 사자를 보내어 그 묘 가까이에 있는 상상전(上上田), 30경을 위토(位土)로 정하고, 그것을 왕위전(王位田)이라 이름지었다. 그 왕위전은 여전히 신라의 영토 안에 속하도록 했다. 수로왕의 17대손 급간 갱세(賡世)가 조정의 지시를 받아 왕위전을 관장하여 매년 세시(歲時)에 술이랑 단술을 빚고, 떡· 밥· 차· 과일 등속의 제물을 차려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. 그 제일(祭日)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 5일, 즉 정월 3일과 7일, 5월 5일, 8월 5일과 15일을 어김없이 지켰다. 아름다운 정성의 이 향사는 지금은 나(ꡔ가락국기+…(생략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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